일우스페이스

전시

제목 일우 주최 기획전 <이름을 문지르며>
 


 
기획, 글_양기찬


 ‘이름’ 뒤로 이어지는 동사 중 일상에서 ‘부르다’와 ‘쓰다’가 익숙하게 연상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 친구와의 잡담, 동료들 간의 논의, 그리고 연인과의 교감 속에서 너를 인지하고, 다가가고, 체감하기에 앞서 ‘너’를 호명하니 말이다. 한편, ‘쓰다’는 외부로 향하는 ‘부르다’보다 내재적이고 자전적인 동작이다. 문서 속에서 당신에게 ‘너’의 존재, 혹은 ‘나’의 존재를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름을 자신의 몸에 경유하여 표면 위에 새기곤 한다. 그것이 역사적인 기록이든, 보고 상의 기재이든, 아니면 편지 상의 함축된 정서이든, 거시적으로나 미시적으로 우리는 굴러가는 시스템 속에서 존재함을 알리려고 이름을 적는다.


 반면에 ‘이름을 문지른다’는 호명과 달리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며 도구가 수반되는 기록과 다르게 손의 직접적인 접촉을 요구한다. 이름을 문지른다는 것은 ‘이름’이 더 이상 듣는 이를 향한 공기의 울림이 아닌 정체된 질량과 부피, 그리고 질감을 가진 유물(遺物)로 놓여 있음을 알린다. 상황에 따라 이름을 매만지는 몸짓은 당신의 부재를 알리는 신호가 되고는 한다. 이는 묘비 앞에 선 이들의 몸부림, 또는 추모비가 놓인 현장에서 종종 쓸쓸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이다. 창백해진 이름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그 밖의 장소에서 수행되기도 하지만, 상황에 뒤따른 감정의 정도와 무관하게 존재를 상기하고 붙들어 보는 작은 동작은 존재와 존재의 물리적 간극 속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공유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착안한 «이름을 문지르며(Rubbing Your Name) »는 존재에 다가서고 매개하려는 각기 다른 창작 행위들 속에서 발견한 원리를 비유한 몸짓이다. 이름을 문지르기 위해서는 이름이 물질로 주어져야 하듯, 8인의 참여 작가들(김상소, 김세일, 구자명, 노충현, 박광수, 박노완, 박지훈, 최서희)은 붙들리지 않는 존재를 질료 속에서 더듬어보며 마주했거나 마주하게 될 존재를 현시하는 경향을 내비친다. 하지만 이곳에 출현하는 존재들은 초점이 선명하지 않은 왜곡된 외양이나 추상적 형태를 갖추고 있어 특정인이나 구체적인 무엇이라고 지목하기가 어렵다. 어느 존재는 제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잔상이나 사물의 흔적, 혹은 공간의 분위기를 통해 암시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동시대에 다른 시간과 환경 속에서 독자적인 몸체를 이룬 형상들은 완전함에 이르지 못하거나 기원을 상실해 버린 듯한 상태로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본 현장은 관객이 지금 여기에서 현전하고 있는 존재를 가까이에 목도하면서도 보지 못하는 역설의 상황에 봉착하도록 만드는데, 이처럼 작품에서 대상이 모호하게 표현된 것은 제한된 몸과 매체에 대한 작가들의 성찰이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에게 접속하도록 돕는 이름이 존재의 천성이 될 수 없듯이, 참여 작가들은 무한히 뻗을 수 없는 육체와 질료의 제약에 따른 재현의 딜레마를 작업의 형식으로 수용한다. 시간을 열거할 수 없는 회화와 조각의 찰나적 순간, 재료의 입자들이 발생시키는 형태상의 왜곡, 그리고 현실에서 작동하는 범위가 상정된 장치 등, 매체의 물리적 구속은 작품이 존재에 이를 수 없는 본질적 격차를 재고하도록 만든다.


 작품이 작품으로써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상은 자명하면서도 둔감하게 감각되는 진실이기도 하다. 참여 작가들은 이러한 형식의 제약을 감추지 않고 적극적으로 노출하여 매개 기능으로써 매체의 불완전함과 매체 자체가 수립할 수 있는 존재성을 보여준다. 회화와 조각을 존재의 매개물이자 동시에 자기 지시(Self-reference)적 매체로 여기는 작가들은 더 나아가 본인의 작품들을 압축된 관계의 장으로써 내보인다. 작가와 존재 간의 관념적, 신체적 시름은 그림에서는 획으로, 조각에서는 결로 나타나며, 주체와 객체의 허물어진 경계는 형상이 중첩되거나 윤곽이 모호한 모습 등으로 출현한다. 따라서 작가들이 접촉했거나 지향하는 존재는 이곳에 없는 듯하지만, 그의 체온과 움직임은 작품이라는 껍데기로 재귀하여 다른 이에게 접속할 매개물로 잔존한다. 이처럼 «이름을 문지르며»는 이름 모를 당신에게 접촉하려는 과정에서 발현된 존재의 일그러짐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자리로 마련이 되었다. 어느 존재의 매개물이자 본래 존재와는 구별된 시공간, 혹은 단독자로서 놓인 형상들은 영원히 연합할 수 없더라도 서로가 닿아 있었고 닿았으며, 닿을 수 있을 순간들을 이곳에서 기린다.

전시기간 2024.11.13 ~ 2024.12.15